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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론보도

[보도]‘월북 조작’ 어민들 ‘빨갱이 굴레’ 벗지 못했다

관리자 | 2017.02.14 16:01 | 조회 49881

‘월북 조작’ 어민들 ‘빨갱이 굴레’ 벗지 못했다

1965년 이후 반공법으로 기소된 ‘1차 사건’ 납북 귀환 어민 1251명
간첩죄 다시 구속 기소 ‘2차 피해’… 고문 후유증에 ‘반공법 위반’ 낙인


이렇게 취재했습니다

지난 1월31일, ‘안녕하십니까? <교도통신> 아와쿠라입니다’로 시작하는 전자우편 한 통이 전달됐다. 일본 언론 <교도통신>의 아와쿠라 요시카츠 서울지국장은 1960년대 북한에 피랍된 남한 어민들에게 ‘빨갱이 딱지’를 붙인 이야기를 <한겨레21>에 싣고 싶다고 했다.

그동안 간간이 <한겨레21>이 보도해온 ‘간첩 조작 사건’ 기사인가 싶었다. 게다가 일본 언론인이 한국 피랍 어민들의 사연을 얼마나 깊이 다룰 수 있을까. 우리는 까다로운 조건을 걸었다. 취재된 사실관계가 풍부하고, 기사 품질까지 담보할 수 있는 초고를 요구했다. “초고 검토 이전에는 기사 게재를 확답할 수 없다”는 단서도 달았다.

약 2주 뒤, 초고가 왔다. 그동안 한국 언론인들이 무시해온, 사각지대에 놓인 피랍 어민 수천 명에 대한 수십 년의 역사를 담고 있었다. 적어도 한국 언론계에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사건을 단독 발굴한 특종’으로 평가할 만했다.

초고 보완 작업을 아와쿠라 지국장에게 의뢰하는 한편, <한겨레21>도 함께 취재에 나섰다. 납북 피해 어민들을 직접 만났다. 피해자들의 원심 판결부, 재심청구서, 납북 피해자 백서, 납북 귀환 어민 피해 기초사실 조사집 등 수백 쪽에 이르는 관련 자료를 일일이 검토했다. 기사의 줄기를 책임진 아와쿠라 지국장과 따로 인터뷰도 했다. 그는 “너무 늦었지만, 국가폭력의 피해자인 이들을 지금이라도 당장 구제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김진수 기자

2008년 10월31일 전주지방법원 군산지원에서 열린 재심에서 한 남성이 무죄 선고를 받았다. 반세기 전인 1967년, 전북 군산 앞바다 개야도 소속 어선 승룡호를 타고 연평도 인근에서 조업 중 북한에 피랍된 서창덕(69)씨. 그는 피랍 17년 뒤인 1984년 북한 간첩 혐의로 전주 510보안대에 끌려갔고 이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 동안 수감됐다. 북한에 억류 중 지령을 받고 한국에 송환된 뒤 기밀을 탐지했다는 것이다.

2008년 10월 재심은 노무현 정부 시절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의 조사를 바탕으로 했다. 진실화해위는 그의 ‘범죄사실’이 고문수사로 이끌어낸 허위 자백에 의한 것이고, 사건 전체가 조작됐다는 점을 밝혔다.


“퉁퉁 부어서 사람 얼굴이 아니었다”

재심에선 검사조차 “피고인은 참기 힘든 큰 피해를 입었다”며 무죄를 구형했다. 그만큼 명백한 조작 사건이었다. “누명을 벗었다고 개야도에서 외치고 싶습니다.” 판결 뒤 서창덕씨는 방송 카메라에 에워싸인 채 눈물을 흘렸다.

그때 서씨로부터 조금 떨어진 법원 계단에서 당시 진실화해위의 이 사건 담당자인 김영진 조사관을 불러 세운 한 여성이 있었다. “남편이 맞아 죽었는데도 나는 진실화해위의 존재조차 몰라 조사를 신청하지 못했다. 내 남편의 억울함도 벗겨달라.” 억울함을 호소한 그녀는 서창덕씨와 함께 납북됐다가 귀환한 승룡호 기관장 고 유재권(1972년 사망)씨의 부인 정은순(80)씨였다. 유재권씨는 서창덕씨처럼 간첩 혐의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그런 유씨의 부인은 왜 “남편이 맞아 죽었다”고 호소한 것일까.

7명이 탄 승룡호는 1967년 5월28일 연평도 부근에서 북한 경비정에 나포됐다. 그해 9월 가장 젊은 이성일(피랍 당시 16살)씨를 제외한 6명은 인천으로 송환됐다. 계속 억류된 이성일씨는 북한에서 결혼하고 2001년 사망한 것으로 전해졌다. 귀환한 6명은 군산 도착 직후부터 북한 내 행적에 대해 군산경찰서에서 조사받았다. 검찰은 서창덕씨를 포함한 몇 명에게 약 1년 뒤인 1968년 9월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하지만 이듬해인 1969년 1월 말 군산경찰서는 돌연 이 사건의 귀환자 전원을 연행해 구금 수사했다. 승룡호가 나포된 해역이 북방한계선(NLL) 북쪽이었다고 단정하면서, 선원 전원이 스스로 NLL을 넘어 북한 해역에 들어가는 반공법 위반 행위(탈출죄)를 했고, 일부 선원은 억류 중 경험한 일을 지인들에게 전해 북한을 찬양·고무했다는 게 경찰이 주장한 혐의의 ‘그림’이었다.

군산경찰서 정보3계 형사들은 조사 중 ‘혐의’를 부인한 선원들을 영장 없이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서창덕씨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1969년 1월 군산경찰서에 수차례 소환된 뒤 체포됐다. 군산경찰서 정보3계 형사들은 조사 중 ‘혐의’를 부인한 선원들을 영장 없이 불법 구금 상태에서 고문해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처음에는 경찰서 인근 여인숙에서 조사받다가 형사가 ‘안 되겠다’고 하더니 경찰서 지하실로 끌고 가서 보름 정도 조사를 받았다. 곤봉으로 때리고 바케쓰(물통)에다 물을 가득 채워 머리를 집어넣는 물고문을 하고, 전기줄을 몸에 대어 지지기도 했다.”

정보3계 남궁 아무개 형사에게 곤봉으로 맞은 서창덕씨는 오른쪽 이마가 찢어져 기절했고, 이틀 동안 피가 멈추지 않아 여섯 바늘을 꿰맸다고 증언했다. 연행되고 약 한 달 뒤 이송된 구치소 기록에는 증언대로 오른쪽 이마의 열상이 쓰여 있다.

세월이 흘러, 피랍 뒤 귀환한 6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가 된 서창덕씨를 비롯해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 선원 유가족의 증언 등을 통해 당시 고문·조작의 실체가 불거지기 시작했고, 결국 서씨는 재심 끝에 무죄를 인정받았다. 그 시절 동안, 서씨와 함께 피랍됐던 유재권씨와 아내 정은순씨에겐 무슨 일이 있었을까.

1969년 1월, 정은순씨는 갑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는 남편 유재권씨가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군산경찰서를 찾아갔다. 하지만 남편을 만나지 못한 채 경찰서 앞에서 계속 기다렸다. 남편을 비롯한 동료 선원들이 한 명씩 여인숙으로 끌려갔다가 경찰서에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정씨는 군산에 방을 얻어 이른 아침부터 통금 시간인 밤 12시까지 경찰서 앞에서 기다리다가 남편이 나오면 뒤따라갔다.

그런 나날이 보름 정도 이어지다가 남편 일행은 더 이상 경찰서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얼마 뒤 남편이 구치소로 이송됐다는 소식을 듣고 지인의 도움을 받아 면회하러 갔다. 그곳에서 만난 남편 얼굴은 “퉁퉁 부어서 사람 얼굴이 아니었다”고 정씨는 말했다. 그때 유재권씨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군산경찰서에서 피랍 선원 6명에 대한 수사가 착수됐음을 서장에게 보고한 ‘범죄 인지 보고’와 서장이 전주지검 군산지청장에게 보낸 ‘국가보안법 위반 및 반공법 위반 피의사건 검거 보고’는 모두 1969년 1월27일치이고 선원들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도 그날부터 작성됐다. 늦어도 이날부터 선원 6명이 구금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다. 6명에 대한 구속영장은 같은 해 2월5일 발부됐고 다음날 집행됐다. 적어도 11일 동안은 영장 없이 불법 구금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

11일 동안 영장 없이 불법 구금

납북 귀환 피해 어민 서창덕(가운데)씨는 ‘피랍-귀환-경찰 고문-자백-반공법 유죄’의 틀에 끼워맞춘 전형적인 ‘조작 사건’ 피해자였다. 그가 2008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뒤 울먹이고 있다. 한겨레

당시 군산시 중앙로1가동에 있던 군산경찰서 근처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는 양아무개(76)씨도 경찰관들이 피의자를 경찰서에서 인근 숙박시설로 연행하는 모습을 자주 봤다고 증언했다. 영장 없는 구금이 경찰서를 주기적으로 순회하는 지역 담당 검사에게 발각되면 문제가 될까 우려한 경찰이 상습적으로 여인숙 조사를 벌였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자신의 ‘혐의’를 인정한 6명은 1969년 3월15일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기소됐다. 이들은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했으나 7월29일 모두 집행유예의 유죄판결을 받아 석방됐고 전원이 항소를 포기해 형이 확정됐다.

“내 남편의 억울함도 벗겨달라”던 정은순씨의 항변은 무죄를 밝혀야 할 피랍 어민들이 서창덕씨 말고도 더 많다는 뜻이었다. 통일부 집계에 따르면, 정전협정 뒤 북한의 어민 납치는 1955년 이후 3729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3263명은 북에서 짧게는 며칠, 길게는 1년 이상 억류된 뒤 남쪽으로 송환됐다. (계속 억류된 어민 466명 중 9명은 2000년 이후 한국 납북자가족모임 등 대북지원단체의 도움으로 탈북했다. 남은 어민들과 1970년대에 한국 서해에서 납치된 고교생, 중국이나 유럽에서 피랍된 사람들을 포함해 돌아오지 못한 납북자는 모두 516명인 것으로 확인됐다.)

북한의 어선 나포는 조기의 황금어장인 연평도 북방 NLL 부근에서 조업하던 남한 어선이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또는 짙은 안개로 방향을 잃고 NLL 북쪽으로 넘어가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1965년 이후 북한은 ‘공격적 나포’를 전개했다. 고속경비정을 NLL 이남으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의 전 간부는 당시 북한의 ‘공격적 나포’에 대해 “박정희 정권의 남베트남 파병(1965년)에 대항해 공산 진영의 일원으로서 북한이 수행하려던 대남 공세의 한 방법이었다”고 말했다. 납치한 어민을 대부분 남쪽으로 송환한 것은 그들에게 김일성 사상을 강의하고 당시 남한보다 발전된 북한 사회를 보여준 다음 남한에 보냄으로써 체제 선전 효과를 노렸다는 것이 한국 정부의 분석이다.

1967년에는 적어도 46척이 나포돼 361명이 납북됐다. 김신조 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 사건으로 긴장감이 최고조였던 1968년에는 납치 피해 규모도 최대에 이르러 어선 90척, 어민 756명이 납치됐다.

당시 한국 정부는 NLL 부근에 해군 함정을 배치해 어선이 NLL에 다가가지 않도록 감시하는 한편, 북한 경비정의 침입을 경계했다. 그러나 과거 납치된 적 있는 어민들은 “당시 30노트 이상의 속도를 자랑하던 북한 경비정 앞에서는 (한국 해군이) 속수무책이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북한 경비정은 2척 1조를 이뤄 남한 어선에 아주 빠른 속도로 접근해 총격으로 위협하면서 조타실을 제압한 뒤 선원을 태워 어선을 북쪽 해역으로 이동시키는 수법을 펼쳤다.

한국 정부는 왜 귀환 어민들을 처벌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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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수무책으로 북한에 끌려간 어민들을 한국 정부는 왜 처벌했을까. 박정희 정권 시절의 당국자는 계속되는 납북 피해 자체가 안보상 위협이며 이를 방지하기 위해 처벌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기자와 만난 전 중앙정보부 간부는 “북한이 납북 어민들에게서 끌어낸 해안선 지형 및 군사시설 배치 정보를 이용해 무장 공작원을 해안선에 침투시킨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해, 해안선을 방위하려면 ‘정보 유출의 원인’이 되는 어민 납북 저지가 필요했고, 이 때문에 어민들에게는 ‘납치되면 안 된다’고 경고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1969년 당시 춘천지검 강릉지청 임상현 검사는 대검찰청이 발행하는 기관지 <검찰>에 기고한 ‘납북 어부의 죄책’이란 제목의 논문에서 납북 어민을 “스스로 NLL을 월선한 후 북괴에 의해 교육을 받으며 한국 내의 정보를 제공한 후 한국 내에서 지하 조직 구축 및 반정부 사상 유포 등의 지령과 금품을 받고 한국으로 귀환한 자”라고 규정했다.

또한 임 검사는 “납북은 어민 개인의 안전에 관한 문제가 아니며 ‘안보상의 문제’로 여겨야 한다. 북한의 의도를 봉쇄하기 위해서는 납북의 원인이 되는 어민의 월선 조업 행위를 억제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 귀환자에게는 종전의 ‘관용’이 아니라 ‘엄벌’로 임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당국의 이런 인식으로 인해 어민들은 북한에 끌려갔다는 이유만으로 처벌당했다. 검찰은 1965년부터 귀환 어민들에게 반공법 및 일반이적수산업법 위반죄를 적용해 기소했다. 1968년 11월9일 내무부가 NLL 남쪽에 설정된 ‘어로저지선’을 넘어 납치된 어민들을 전원 구속하라고 경찰에 지시한 뒤부터는 ‘전원 처벌’이 원칙이 됐다. 승룡호 선원 몇 명이 첫 수사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지 두 달 뒤의 일이다.

결국 1969년 초에 시작된 승룡호 선원 재수사 및 불법 구금 수사는 이 지침을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나포된 위치나 상황과 상관없이 ‘자진 월북’을 전제로 기소하려는 수사가 전국적으로 행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렵 납북된 어민들은 ‘자진 월북’ 혐의를 완강히 부인한다. 한국 정부의 처벌이 무서워서 아예 NLL에 접근하는 어선이 없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처벌 방침을 내건 한국 정부의 태도, 이를 피하려는 어민들, 그리고 NLL 남쪽까지 내려와 ‘공격적 나포’를 벌인 북한의 방침 등을 종합하면, 이 시기 납북 어민의 대부분은 NLL 남쪽에서 납치됐을 가능성이 높다.

진실화해위에서 서창덕씨 사건을 담당한 또 다른 조사관인 변상철씨는 “북한보다 기동력이나 화력 면에서 열세였던 해군과 해경이 한국 어선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어민에게 NLL 월선이란 누명을 씌운 것이 납북 어민 사건의 본질이다”라고 말했다.

납북 어민들이 스스로 NLL을 월선했다고 주장하려면 레이더 항적도 등 객관적 증거를 확보해야 하지만, 그럴 능력이 없던 한국 경찰로선 어민들의 자백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결국 납북 어민 전원 처벌 방침은 ‘전원 조작’ 방침이나 마찬가지였다.

서창덕씨는 이런 자백을 거절하다가 고문 끝에 간첩 혐의까지 뒤집어쓰고 장기 복역했다. 어쩔 수 없이 자백한 승룡호의 다른 선원들은 집행유예의 유죄판결로 반년 만에 석방됐다. 승룡호 선원 유재권씨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얼핏 유씨의 ‘피해’는 서씨의 그것보다 가벼워 보인다. 과연 그럴까.

“피가 흥건할 때까지 바닥을 긁었다”

정은순씨는 “남편 유재권씨가 맞아 죽었다”고 했다. 고기 잡으러 갔던 남편은 납북 귀환 뒤, 경찰의 조작 수사 과정에서 고문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정씨는 지금도 남편이 끌려갔던 곳 주변을 서성인다. 아와쿠라 요시카츠 제공

유재권씨는 연행될 당시, 6살부터 12살에 이르는 세 딸을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버지였다. 그런 그가 석방돼 집에 돌아온 뒤 정신이 나간 것처럼 무기력해지고 딸들을 멍하니 바라만 보는 사람으로 변했다고 정은순씨는 회고한다. 만성 두통에 시달렸으나 병원비를 마련하지 못해 진통제를 먹는 것이 유일한 치료였다.

막내딸 유옥선(54)씨는 정신이 파괴된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한다. “아빠는 작은 소리에도 놀라서 방구석에 엎드려 손톱이 다 빠져 피가 흥건해질 때까지 바닥을 긁었다. 발작을 일으키듯이 내 무릎을 몇 번이나 주먹으로 때린 뒤 정신이 들면 멋쩍은 듯 나를 등에 업고 달랬다.”

정은순씨가 생선을 팔아 생계를 꾸렸지만 딸들은 학교도 못 다니게 됐다. 석방된 지 3년 만에 겨우 지인의 소개로 뱃일을 다시 시작한 유재권씨지만, 군산 앞바다에 나간 배 안에서 작업 중 갑자기 쓰러졌다. 소식을 듣고 항구로 달려간 아내와 세 딸은 이미 세상을 떠난 유씨와 대면했다.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지만, 유족은 고문 후유증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유씨의 나이는 36살이었다.

유재권씨 친척이자 승룡호의 동료 선원인 박공출씨는 석방 이후 왼쪽 옆구리 통증에 계속 시달렸다. 고문수사로 갈비뼈가 부러져 “아파 죽겠다”고 경찰에 호소해도 계속 두들겨 맞았다고 석방 뒤 가족에게 털어놨다. 이때의 부상이 원인이 돼 늑막염이 만성화됐다.

5명의 아이가 있는 박공출씨는 이대로 개야도에 남으면 언젠가 자식들도 어민이 돼 자신과 같은 피해를 입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섬을 떠났다. 충남 서천군 장항으로 옮겨가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려 했으나, 통증으로 농사일을 못하는 날이 종종 있었다. 차남 박용덕(51)씨는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한 내용을 기억한다. “나쁜 짓 하지 마라. 나쁜 짓 하면 경찰에 끌려가서 하지도 않은 일을 뒤집어쓴다, 나처럼.”

박공출씨도 가난 때문에 거의 치료를 받지 못했다. 통증과 고문의 기억을 없애기 위해 술도 마셨다. 석방되고 10년이 지난 1979년 옆구리 통증이 심해져 한 달가량 밤에 잠을 못 자자 통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농약을 먹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당시 44살이었다.

서창덕씨의 고모부이자 승룡호 동료인 이길부씨는 몸이 쇠약해 1969년 이후 집에서 나가지 않았으나, 1976년 다시 군산경찰서에 연행돼 간첩으로 몰렸다. 징역 12년의 중형을 받고 출소한 뒤 아들 이광열(68)씨에게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어 살아서 (교도소에서) 돌아왔다”고 했다. 이길부씨는 2002년 79살에 사망했다.

“‘억울하다’고 말하고 싶어 살아서 돌아왔다”

승룡호의 선주 겸 선장이자 항상 밝은 성격이었던 박상돈씨도 석방 뒤 과묵해졌다. 새벽에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나 “악몽을 꿨다, 깊이 못 잔다”고 매일같이 말했다고 딸 박종자씨(64)는 회상한다. 박상돈씨는 고통받은 다른 선원이나 그 가족들이 선장이던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 것이라는 마음의 짐도 안고 살았다. 박종자씨는 “저도 아버지의 동료 가족들에게 죄인이 된 마음으로 살아왔다”고 말했다.

석방된 지 15년 만인 1984년, 박상돈씨는 이번에는 전주 510보안대로 끌려갔다. 한 달 정도 지나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 가족이 가보니 타박상과 내출혈로 온몸이 까매져 혼자서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이후 몸이 쇠약해진 박씨는 중풍으로 쓰러져 15년 동안 누워 지내는 긴 투병 끝에 2005년 72살에 사망했다.

선장 박상돈씨가 15년 만에 다시 고문수사를 받던 무렵, 승룡호에서 취사 담당이던 서창덕씨 역시 510보안대에 끌려가 고문당했다. 당시 서씨는 3평 남짓한 지하실 천장에 매달려 각목으로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대여섯 번 기절했다. 고문당할 때 옆방에서 들려온 비명이 박상돈씨 목소리였다고 서씨는 증언했다.

귀환자와 가족은 이후에도 ‘납북 귀환 어부 관리카드’에 올라 계속 감시당했다. 귀환자 대부분이 첫 번째 처벌에 따라 자격정지를 받았기 때문에 수년간 배에 탈 수 없었고 취직도 어려웠다.

결국 서창덕씨는 “귀환 뒤 15년 동안 한국에서 기밀 탐지를 해왔다”는 허위 자백을 강요받아 간첩으로 7년 동안 옥고를 겪었다. 1969년의 고문수사가 ‘1차 사건’이었다면, 1984년에는 ‘2차 사건’을 조작한 것이다. 서씨는 2차 사건으로 복역하고 1991년 가석방된 뒤에도 보안관찰 처분을 계속 받았고 2005년에야 겨우 면제됐다. 2008년 서씨가 재심에서 받은 무죄판결은 2차 사건만을 다룬 것이었다.

510보안대는 서창덕씨를 수사하기 직전, 북한에 억류돼 있던 이성일씨의 맏형 이양일(75)씨도 연행해 고문했다. 이씨는 “남쪽에 잠입한 동생과 접촉한 거 아니냐”는 보안대의 추궁에 사실무근이라며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 기소를 면했다. 처음엔 이양일씨를 간첩으로 몰고 가려던 보안대가 이씨의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자 그 대상을 서창덕씨로 바꿨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귀환한 6명 중 2명은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고, 2명은 2차 사건으로 장기 복역했고, 기소를 면한 1명도 수차례 고문 피해를 입었다.

승룡호 선원 중 나머지 한 명인 백진룡(가명)씨는 유일하게 감시당하지 않고 2차 사건 피해도 입지 않은 채 살다가 몇 년 전 양로원에서 사망했다. 백씨가 피해를 면한 것은 군산경찰서 형사 중 친척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러 관계자들은 말한다.

백씨를 제외한 나머지 귀환자와 가족은 이후에도 ‘납북 귀환 어부 관리카드’에 올라 계속 감시당했다. 귀환자 대부분이 첫 번째 처벌에 따라 자격정지를 받았기 때문에 수년간 배에 탈 수 없었고 취직도 어려웠다. 가장이 돈을 벌 수 없어서 더 가난해진 가족은 ‘빨갱이 가족’이라며 손가락질당하고 지역사회에서 소외됐으며 영세민으로 살아왔다. 승룡호 선원의 자식들은 사돈의 팔촌까지 적용된다는 연좌제 때문에 취직이 제한됐고, 그 가운데 여러 명은 아버지가 납북된 일을 빌미로 파혼 또는 이혼 등 가정 파탄을 겪었다.

특별법에 의해 2005년 12월 한시적으로 설치된 진실화해위는 과거의 인권침해 사건 접수 기간을 2006년 11월까지 1년으로 제한했다. 이 기간에 접수된 납북 귀환자 사건은 서창덕씨의 2차 사건을 포함해 8건이 전부였다. 납북됐다가 송환된 3263명 가운데 극히 일부였던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서창덕씨 사건 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민 간첩 조작 피해자가 많을 수도 있다는 의혹을 품게 됐다. 과거 중앙정보부가 작성한 ‘검거 간첩 유형별 현황’ 등에 따르면 간첩 사건과 관련된 납북 어민 수는 1951년 이후 103명에 달했다.

납북 어민의 진상 규명에 나선 조사관들은 피해자를 찾기 위해 반공법 및 수산업법 위반 사건의 형사재판 기록을 분석했다. 그 결과 1965년 이후 적어도 나포된 어선 254척에 탔던 어민 1251명이 기소된 사실을 확인했다. 이들 어민을 추적해 귀환 뒤 간첩죄로 복역했으나 누명을 썼다고 호소하는 28명을 2009월 7월까지 밝혀냈다. 사건 전체를 밝히지는 못했으나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의 실태가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김영진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은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한 사람들의 피해가 이렇게 심각한 줄 몰랐다. 진실화해위 내부에서도 크게 놀랐다”고 말했다.

이명박 정부 때 중단된 사건 조사

강제적 납북 귀환 뒤 ‘반공법 위반’ 누명을 쓴 이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 박충환(오른쪽 두 번째)씨도 고문·강요에 의한 자백으로 두 차례에 걸쳐 7년8개월간 억울한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한겨레

다만 이 과정에서 진실화해위의 진상 규명 노력은 제한적이었다. 한시적 활동 기간 등의 제약으로 인해, 간첩 조작 피해에만 조사를 집중했고, 그 바탕을 이루는 ‘모집단’, 즉 피랍 뒤 송환됐지만 반공법 등으로 기소된 1251명 전체의 피해를 규명하지는 못했다.

서창덕씨의 재심 무죄판결을 지켜본 다른 승룡호 선원의 유가족들은 2008년 말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호소문을 진실화해위에 제출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시 진실화해위 인권침해조사국장을 맡은 이명춘 변호사는 “1차 사건에서도 심각한 피해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됐지만, 간첩 사건 처리가 더 시급한 과제라고 판단했다. 조사 인력과 시간이 부족해 1차 사건을 조사할 여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2차 사건보다 1차 사건의 피해자가 더 극심한 고문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특정 인물을 표적으로 삼아 간첩으로 둔갑시킨 2차 사건에서는 고문기술을 가진 이른바 ‘고문 전문가’가 심문을 담당했지만, 지방 경찰관들이 직접 나선 1차 사건 피해자들은 고문의 방법도, 한계도 모르는 이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해 고문 피해가 더 심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반공법 기소자’의 처벌은 시기별로 요동쳤다. 기자가 직접 1251명의 재판 기록을 분석한 결과, 검찰이 납북 뒤 귀환자의 기소를 시작한 1965년부터 1967년까지 기소된 127명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14명이고 90%에 가까운 113명이 무죄를 받았다. 어민이 스스로 NLL을 넘어가지 않았던 정황을 그나마 사법부가 구분해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

하지만 납북 피해가 절정에 달한 1968년, 검찰의 어민 기소가 455명으로 급증하면서 어민들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도 뒤집혔다. 이 시기 기소자 가운데 무죄는 74명(16%), 유죄는 381명(84%)이었다.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항소심·상고심에서 역전돼 유죄판결을 받은 피고인도 속출했다.

이 무렵부터 사법부는 박정희 정권의 ‘방침’을 추인했다. NLL을 넘으려는 적극적인 의사가 없었다고 해도 월선의 가능성을 ‘인식’했다는 것만 입증한다면, 그 어민에게 반공법상 탈출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세운 것이다.

결국 ‘반공법 기소자’들은 기소되기 전에 고문수사로 고통당하고, 기소 뒤 유죄판결로 반공법 위반 전과를 갖게 됐으며, 이후 생애에서 보호관찰과 연좌제 등으로 큰 피해를 입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피해는 온전히 밝혀지지 못했다. 과거사 청산 종결을 서두른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10년 6월, 진실화해위 조사는 중단됐다. 1차 사건은 피해 사실조차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남겨졌다.

납북 어민 1차 사건 피해자에게 한국 정부가 관심 가질 만한 기회는 한 번 더 찾아왔다. 현재 516명으로 확인되는 미귀환 납북자 가족이 만든 ‘납북자가족모임’이 과거 정권에 의한 연좌제 피해 보상 및 미귀환자 송환 노력을 촉구한 결과 2007년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체결 이후 납북 피해자의 보상 및 지원에 관한 법률’(납북 피해자 보상법)이 제정, 시행됐다. 그중에는 귀환 납북자와 그 가족이 국가 공권력으로 입은 피해를 보상하는 항목이 있다.

그러나 이 법률은 납북자를 ‘본인의 의지에 반해’ 북한에 들어간 자로 정의하고 있다. 또 반공법은 나중에 현행 국가보안법으로 통합됐는데, 이 반공법의 주요 조항으로 처벌받은 자는 귀환 납북자로 취급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1차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자는 납북 피해자 보상법의 구제 대상에서도 배제됐다.

반공법 처벌받으면 보상법 구제 대상에서 배제

그 결과, 납북 피해자 구제 정책에도 큰 모순이 생겼다. 같은 배를 타고 피랍됐다 해도, 북한에 억류된 이는 피해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이후 남쪽으로 귀환한 이는 (고문·조작에 의해) 1차 사건에 연루됐다는 이유만으로 ‘자진 월북자’로 방치된 것이다. 승룡호 사건 관련자 가운데 북한에 남겨진 이성일씨는 피해자로 인정돼 그 가족에게 위로금이 지급됐지만, 귀환한 6명의 전과는 그대로 남았다. 다른 피해 선박에서도 같은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그들을 지금이라도 구제하려는 노력이 시작됐지만, 아직 미약하고 험난하다. 진실화해위에서 서창덕씨 사건의 조사를 담당했던 김영진씨, 변상철씨 등은 위원회 종료 이후에도 납북 어민을 포함한 과거사 관련 피해자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비영리단체(NPO) ‘지금 여기에’ 사무국장을 맡은 변씨는 승룡호 선원의 유가족을 만나 재심 준비를 돕고 있다.

구속영장 집행 11일 전부터 불법 구금 상태였을 가능성이 컸다는 점을 드러내는 군산경찰서의 수사기록, 납북 사건 뒤 겪은 고통을 기술한 호소문 등을 증거로 서창덕씨와 네 가족은 2013년 4월 전주지법 군산지원에 재심을 청구했다. ‘2차 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을 받은 서씨는 다른 동료 선원과 함께 ‘1차 사건’에 대한 정의도 구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재심을 청구하던 무렵만 해도 “남편의 한을 풀고 자식들에게 붙은 빨갱이 딱지를 떼고 싶다”던 정은순씨의 염원이 금방이라도 이뤄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군산지원은 2014년 8월 청구를 기각했다. “유족 및 서씨의 호소문 정도로는 재심 개시 사유로 인정할 만한 위법 수사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보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불법 구금 사실을 강력하게 시사한 당시 수사기록에 대한 평가를 외면한 결정이었다.

유족들은 미귀환자 이성일씨가 정부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은 사실을 덧붙여 전주지법에 항소했으나 이 또한 인정되지 않았고, 대법원은 2016년 4월 재항고를 기각했다. 자원봉사로 나선 인권활동가의 지원을 받아 남편,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던 가족에게 납북 49년 만에 전해진 잔인한 소식이었다.

납북 어민 간첩 조작 사건이 이미 20건 이상 재심 무죄판결이 확정된 상황에서 승룡호 유가족이 “왜 우리만 인정되지 않는가”라고 억울해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비록 죄명은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지금까지 겪은 고통은 똑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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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NLL 넘어와 납치했는데 어민만 처벌”

희망을 잃은 듯한 유가족은 변상철씨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서고 있다. 변씨는 1969년 당시 수사 자료를 자세히 검토하던 중 폭행이 의심되는 부분을 새롭게 발견했다. 유가족에게서 상세한 피해 상황을 듣고 이를 바탕으로 2016년 10월 다시 재심을 청구했다.

수사기관에 어떤 저항도 하지 못한 납북 어민들은 법정, 감옥, 지역사회 등에서도 도움을 받지 못했다. 과거사 진상 규명 사업이 진행되는 중에도 먹고살기에 바빠 조사 신청 기회를 놓쳤다. 지금도 국가에 대한 불신이 커서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들에게 국가가 먼저 피해 규명에 나서야 한다고 변씨 등은 생각한다. 변씨는 “사회 공동체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법적 지식이 없고 경제적으로도 열악한 상황에 놓인, 가장 약한 사람들을 표적으로 한 국가 공권력의 조직적 조작 사건”이라고 비판했다.

천신만고 끝에 진행된 두 번째 재심 청구가 받아들여질지 예단하기는 힘들다. 다만 최근 희망적인 소식이 유족들에게 전해졌다. 지난 1월24일 서울고법 제12형사부는 1969년 납북돼 귀환 뒤 고문수사로 유죄판결을 받은 최순복(65)씨와 고 최남옥씨에 대한 재심에서 영장집행 전 불법 구금한 사실을 인정해 ‘NLL 월선을 인정한 진술에는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귀환 어민에 대한 위법 수사를 이유로 든 한국 사법 사상 첫 무죄판결이었다. 이는 승룡호 사건을 비롯한 다른 어민의 1차 사건 구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는 판단 결과다.

최순복씨 등에 대한 변론은 진실화해위에서 충분히 조사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던 이명춘 변호사가 맡았다. 지난해 12월 결심공판의 마지막 변론에서 이 변호사는 납북자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북한이 NLL을 넘어와 납치해 갔는데도 대한민국 정부가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고 어민만 처벌하는 아주 기묘한 상황이 되었다.”

2008년 여름, 필자가 처음 찾아간 정은순씨는 만나자마자 “내 남편은 맞아 죽었어요. 어떻게 좀 도와주세요”라고 유재권씨 이야기를 꺼냈다. 유씨가 군산경찰서와 여인숙을 오가며 수차례 끌려간 상황 등 정씨가 말한 1969년의 기억은 너무나 뚜렷했다. 정씨는 다만 “남편이 어떤 고문을 당했는지는 들은 적이 없다”고 계속 말했다. 그런 정씨가 2008년 진실화해위에 제출하기 위해 세 딸과 같이 손으로 써내려간 호소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피해자(유재권씨)는 (당시 조사 때 형사가) ‘승룡호의 기관장으로서 기계를 조작하여 배를 북으로 몰고 간 것이 아니냐. 바른 대로 말하지 않으면 살아서 바깥세상으로 나가지 못한다’며 며칠 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거꾸로 매달아 몽둥이로 때리며, 끌어 앉혀놓고 온몸을 닥치는 대로 군홧발로 밟고 가혹 행위를 하였고….”

‘이런 고문의 기억은 누구에게서 들은 것이냐’는 질문에 정은순씨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막내딸 유옥선씨가 말했다. “그건 석방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아빠가 엄마에게 말한 거예요. ‘몸이 왜 이렇게 됐느냐’는 엄마의 물음에 아빠가 그렇게 말했다고 저는 엄마한테 들었어요. 엄마는 ‘내가 어떻게 죽더라도 너희 아버지가 어떻게 죽었다는 것을 너희나 알아두라’고 말씀을 해주셨어요.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그걸 제가 적은 거예요.”

지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고통의 기억

“언젠가는 남편의 명예를 회복해주고 싶다”는 정씨는 아픈 기억을 안고 호소해왔다. 그런데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만큼은 딸에게 맡긴 채 자신의 머릿속에서 지우고 살아온 것이다. 적어도 1251명. 가족을 포함하면 그 몇 배의 피해자를 낳은 납북 귀환 어민 사건은 과거사 인권침해 진상 규명 사업의 사각지대에 놓여, 명예 회복이나 보상은커녕 피해의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반세기가 흘러 많은 피해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고 그 가족에게는 지울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긴 고통의 기억만 남아 있다.


출처 :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43084.html

담당 기자 : 아와쿠라 요시카츠 일본 <교도통신> 서울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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